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은 어둠 속에서 빛을 갈구하는 두 인물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걸작이다. 1970년대 오사카를 배경으로, 살인 사건에서 시작된 비밀이 20년간 얽히며 펼쳐지는 서스펜스와 인간관계의 깊이를 담았다.
나는 최근 책장에 꽂혀 있던 백야행을 꺼내 다시 읽기 시작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은 이미 내게 익숙한 존재였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몇 년 전 용의자 X의 헌신을 통해서였는데, 그때부터 이 작가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렸다. 백야행은 그중에서도 유독 강렬하게 마음을 흔든 책이다. 이번에 다시 페이지를 넘기며 느낀 감정은 처음 읽을 때와는 또 달랐다. 어쩌면 내가 나이를 먹고 세상을 조금 더 알아가면서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의 선택과 아픔이 새롭게 다가온 걸지도 모른다.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단순히 추리 소설을 기대했다. 살인 사건의 진범을 찾는 형사의집념,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반전이 이 책의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장을 넘기자마자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백야행은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었다. 이건 두 사람, 유키호와 료지의 이야기였다. 그들이 어둠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태양을 보지 못한 채 하얀 밤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제목이 상징하는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이야기는 1973년 오사카의 허름한 당구장에서 시작된다. 한 남자가 살해당하고, 그 사건을 파헤치려는 형사 사사키 준이치의 시선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처음엔 사사키가 주인공인 줄 알았다. 그의 집요한 추적이 이 책의 중심축이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곧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어린 시절 비극적인 사건으로 얽힌 유키호와 료지가 등장하면서, 나는 점점 그들의 삶에 몰입하게 됐다. 사사키는 어느새 조연으로 밀려나고, 이 두 사람의 궤적이 내 가슴을 쥐어짰다.
유키호라는 캐릭터는 정말이지 잊을 수 없다. 그녀는 아름답고, 똑똑하고, 누구나 매료될 만큼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그 완벽함 뒤에 숨겨진 냉정함과 계산적인 모습은 나를 소름 돋게 했다. 처음엔 그녀를 이해하려 애썼다. 어린 시절 겪은 끔찍한 일들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거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변명은 점점 힘을 잃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고, 필요하면 버리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마력일지도 모른다. 그는 독자로 하여금 도덕적 경계를 넘나들게 만들면서도 끝까지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반면 료지는 유키호와는 또 다른 의미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걸 바쳤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내주고, 죄를 짊어지며, 심지어 빛을 포기했다. 유키호가 태양이라면, 료지는 그 태양을 지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 희생하는 그림자 같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읽는 내내 그 질문을 던졌다. 사랑이라기엔 너무 비극적이고, 의존이라기엔 너무 깊었다. 그저 서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기묘한 공생의 형태였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지막이었다. 스포일러를 피하려고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겠지만, 그 결말은 내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료지의 최후와 유키호의 선택은 마치 운명의 장난 같았다. 나는 책을 덮고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들이 정말 원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행복이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계속 생각하게 됐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결코 쉬운 답을 주지 않는다. 그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스스로 찾아가게 만든다.
문체도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다. 나는 평소에 너무 장황한 묘사는 싫어하는 편인데, 히가시노의 글은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다. 불필요한 군더더기 없이 사건과 감정을 정확히 찍어낸다. 특히 시간의 흐름을 다루는 방식이 놀라웠다.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다루면서도 이야기가 전혀 늘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퍼즐 조각을 맞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다음 장을 읽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많이 느낀 건 인간의 욕망과 죄책감에 대한 고민이었다. 유키호와 료지는 분명 잘못된 선택을 반복한다. 그들의 행동은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삶을 원했던 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겪은 상처와 사회의 냉대가 그들을 그렇게 몰아간 게 아닐까. 히가시노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 숨겨진 연약함을 놓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꼭 읽어 봐”라고 말할 것이다.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을 찾는 사람에게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도 백야행은 완벽한 선택이다. 읽는 동안 지루할 틈이 없었고, 다 읽고 나서는 오랫동안 생각할 거리를 남겼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진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더 찾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만, 이 책이 모든 사람에게 맞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어두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라 백야행의 분위기가 딱 좋았지만, 밝고 희망적인 결말을 원하는 사람에겐 조금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도 한 번쯤 도전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소설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독서를 통해 많은 걸 느꼈다. 인간관계의 복잡함, 선택의 무게, 그리고 삶의 아이러니까지. 백야행은 나에게 하나의 소설 이상이었다. 마치 내가 그 이야기 속에 들어가 유키호와 료지의 곁에서 그들의 삶을 지켜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런 경험을 선사하는 데 탁월한 작가다. 앞으로도 그의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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