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는 손원평의 첫 장편으로, 감정을 읽지 못하는 윤재와 폭발하는 곤이의 엇갈린 만남 속에서 공감의 뿌리를 파헤친다. 날것의 심리와 단단한 서사로 100만 독자를 사로잡은 독보적 소설.
『아몬드』를 읽고
나는 책을 손에 쥐는 순간부터 그 세계에 발을 걸친다. 잉크 냄새가 스며든 종이, 손끝에 닿는 질감, 이야기가 나를 집어삼키는 그 찰나가 좋다. 『아몬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별다른 예고 없이 그저 책등을 훑었다. 표지의 소년이 던지는 묘한 눈빛에 끌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첫 문장을 넘기자마자 나는 윤재라는 이름 속으로 미끄러졌다. 감정을 모르는 소년, 그의 텅 빈 시선이 나를 붙잡았다.
윤재는 알렉시티미아라는 낯선 병명을 달고 산다. 머릿속 ‘아몬드’가 작아서 감정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단다. 나는 그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고개를 갸웃했다. 감정이 없다니, 그건 대체 어떤 상태일까? 내 안에서는 늘 감정이 물결처럼 출렁인다. 짜증이 치솟으면 손이 저절로 꽉 쥐어지고, 기쁨이 차오르면 입꼬리가 실룩인다. 그런데 윤재는 그 모든 파도가 없는 호수였다. 누가 쓰러져도, 세상이 무너져도 그는 그저 고요히 서서 사실을 주워 담았다. 그 고요함이 나를 뒤흔들었다. 감정 없는 삶은 텅 빈 껍데기일까, 아니면 또 다른 충만함일까?
그러다 곤이가 등장했다. 곤이는 윤재와는 정반대의 불꽃이었다. 분노가 그의 숨결을 태우고, 그 열기가 페이지 밖까지 뿜어져 나왔다. 나는 곤이를 처음 봤을 때 살짝 몸을 움츠렸다. 저런 격렬함은 왜 터지는 걸까? 저 불꽃은 어디서 뿜어져 나온 걸까? 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풀리면서 나는 그 뒤에 숨은 얼어붙은 상처를 들여다봤다. 곤이는 아픔을 뱉어내는 법을 몰랐다. 분노는 그의 방패였다. 나도 가끔 그 방패를 든다. 마음이 뒤틀릴 때면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고, 손끝이 차가워진다. 곤이를 통해 나는 내 안의 작은 불씨를 발견했다.
윤재와 곤이가 얽히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감정을 모르는 소년과 감정에 휘둘리는 소년이 맞닿으면 어떤 소용돌이가 일어날까? 나는 폭풍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들은 충돌 대신 서로의 빈틈을 메웠다. 윤재는 곤이의 뜨거움 속에서 감정의 실마리를 더듬었고, 곤이는 윤재의 차가움 속에서 숨을 고르며 균형을 잡았다. 그 모습이 나를 찔렀다. 특히 윤재가 곤이에게 “너는 괜찮아”라고 던지는 장면은 내 가슴에 오래 맴돌았다. 감정의 문턱을 넘지 못하던 소년이 내뱉은 그 말은, 작지만 단단한 돌멩이처럼 나를 때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공감이라는 단어를 새로 썼다. 우리는 매일 사람들과 얽힌다. 그들의 말투, 표정, 숨소리까지 맞물리며 살아간다. 공감은 그저 상대의 마음을 흉내 내는 걸까? 아니면 더 깊은 곳으로 손을 뻗는 걸까? 윤재는 감정의 물결을 타지 못했지만, 곤이의 세계를 읽으려 애썼다. 그 어설픈 손짓이 나에게 공감의 새 얼굴을 보여줬다. 공감은 완벽히 아는 게 아니라, 마음의 문을 살짝 열어주는 거였다.
자두맛 사탕은 나를 묘하게 건드렸다. 윤재가 그 사탕을 입에 굴릴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자꾸 저걸 꺼내는지 나중에야 그 사탕이 윤재의 얇은 기억 속에 뿌리내린 엄마의 흔적임을 깨달았다. 그 순간, 내 목구멍이 메였다. 나에게도 그런 조각이 있다. 어릴 적 아빠가 건네던 초록 사과껍질, 친구가 몰래 쥐여준 손편지. 그런 것들이 나를 시간 속으로 끌고 간다. 윤재의 자두맛 사탕은 감정 없는 그의 세계에도 색을 입혔다.
사랑에 대해서도 나는 이 책과 씨름했다. 윤재와 곤이는 우정일까, 그 이상일까? 손원평은 그 선을 흐릿하게 남겼다. 나는 그 흐릿함이 마음에 들었다. 사랑은 꼭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도 된다. 서로의 빈 곳을 채우고, 서로의 날을 무디게 하는 것. 곤이가 윤재를 위해 몸을 던지는 순간, 윤재가 곤이를 위해 발을 내딛는 찰나, 나는 그 안에 사랑의 맥박을 들었다. 나에게 사랑은 말로 꿰맬 필요 없는 바람 같은 거다.
『아몬드』는 내 머릿속에 질문을 뿌렸다. 감정은 왜 필요한가? 공감은 어디까지 뻗을 수 있나? 사랑은 어떤 색깔인가? 나는 그 물음 앞에서 망설였지만, 한 가지를 건졌다. 우리는 모두 다른 결을 지녔고, 그 결들이 얽혀 세상이 굴러간다. 윤재와 곤이가 그랬듯, 나와 너도 달라서 서로를 만난다. 그게 이 책이 내 손에 쥐여준 진실이었다.
윤재의 목소리는 나를 끝까지 붙들었다. 1인칭으로 짜인 이 이야기는 그의 머릿속을 열어젖혔다. 차갑고 단단한 문장들이 나를 그의 시선으로 밀어 넣었다. 손원평의 손끝은 날카롭고도 부드러웠다. 나는 그 리듬에 몸을 맡겼고, 어느새 윤재처럼 세상을 낯설게 바라봤다. 감정이 없어도 삶은 흘러가고, 그 흐름 속에서 의미가 자란다는 걸 나는 그의 눈을 빌려 봤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한참을 허공에 떠 있었다.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윤재와 곤이가 떠난 빈자리가 컸다. 하지만 그 빈자리만큼이나 내 안에 채워진 것도 있었다. 나는 『아몬드』를 누구에게든 건네고 싶다. 감정의 무게를 고민하거나, 사람 사이의 틈을 메우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그 길을 함께 걸어줄 것이다.
후기
『아몬드』는 나를 단숨에 삼켰다. 나를 들여다보게 하고, 세상의 결을 새로 그리게 했다. 손원평의 날선 문장과 살아 숨 쉬는 캐릭터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며 나는 내 안의 조각들을 다시 맞췄다. 언젠가 이 책을 다시 꺼내 들고, 윤재와 곤이의 숨소리를 다시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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